호남정맥8차(감상굴재~천치재)

2024. 6. 30. 21:589정맥/호남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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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시 : 3월 27일(금)~3월28일(토) 무박

- 날      씨 : 맑음

- 산악회    : 3050알파산악회  

 - 산행거리 : 20.67km 

- 산행시간 : 9시간 14분

- 일      행 : 25명 

- 산행코스 : 감상굴재-대각산-어은동고개-도장봉-생화산-항목탕재-병풍지맥분기점-520.1봉-밀재-

                 추월산-수리봉-깃대봉(심적산)-사법연수원-520봉(북추월산)-산신산(390.6봉)-천지재

호남8차(감상굴재~천치재).gpx
0.10MB

 

- 04:30 감상굴재/49번 도로

- 05:00 대각산(528m)

- 06:05 어은재/보호수

- 06:23 도장봉

- 07:04 생화산

- 07:29 항목탕재/느티나무

- 07:55 병풍지맥 분기점

- 08:26 520.1봉

- 08:41 밀재

  (20분간 아침식사)

- 10:11 추월산 정상

  (중간 15분 휴식)

- 11:10 수리봉 정상 

- 11:46 깃대봉(심적산)

- 12:19 사법연수원

  (연수원입구 정자에서 20분 휴식)

- 13:01 북추월산

- 13:40 산신산(390.6봉)

- 13:52  천치재/29번 도로

 

이번구간은 100대명산인 추월산을 지나는 구간이다.

산행초입 대각산까지 10여분 가파른 오르막길이나 새벽이라 힘든줄 모르고 오른다.

이후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어은재, 도장봉을 지나면 생화산갈림길이다.

생화산을 왕복하는데는 10여분 걸린다

이후 느티나무가 있는 항목탕재를 지나 병풍지맥 분기점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520.1봉 오르막길은 멋진 암릉지대로 절벽구간이라 좀 힘들게 올라야 한다.

520.1봉에서 하산하면 금새 밀재다.

밀재에서 추월산 정상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로 1시간쯤 올라야 한다.

추월산 정상부터 수리봉 정상까지는 우측편 담양호 풍광이 멋지다.

수리봉을 하산하여 깃대봉(심적산)까지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깃대봉(심적산)을 지나면 로프가 매져 있는 급경사 지역이 간간이 나타난다.   

가인연수원 마당을 지나 포장도로를 잠시 따라 가면 좌측 북추월산 오르는 오르막길이다.

20여분 힘들게 오르면 북추월산이고 이후 산신산을 지나 천치재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하산을 완료하니 산악회버스 옆에 삼겹살 불판이 펴져 있다.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여 야외에서 삼겹살에 한잔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10여분 힘들게 오른 대각산

어은재에 도착하니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도장봉은 밋밋한 능선길에 있다.

생화산은 정맥길에서 벗어나 있어 왕복해서 다녀와야 한다.

항목탕재

병풍지맥은 담양 병풍산 삼인산으로 이어진다.

진달래가 꽃몽우리를 피우기 시작한다.

520.1봉 절벽지대

520.1봉 오르는 길

520.1봉 정상직전 바위

520.1봉 정상

아름다운 산너울

밀재

밀재에서 추월산 오르는 입구

추월산 오르는길 좌측은 순창군 우측은 담양군이다.

추월산 정상 조망

4년전애 오르고 두번째 올라와 보는 추월산 정상

4년전에는 정상석이 없었다.

월계리 보리암 갈림길에서 내려다 본 담양호

월계삼거리에서 대법원연수원방향으로 가야한다.

수리봉 오르기전 담양호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한다.

담양호를 배경으로

수리봉밑 암릉

수리봉 정상

지나온 추월산 방향

수리봉에서 내려다 본 조망

깃대봉(심적산) 정상은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생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깃대봉을 하산하며 내려다본 사법연수원

사법연수원(가인연수원) 전경

 

정부 수립 초기, 카리스마가 강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사법부를 마땅치 않아했다.

판결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헌법을 내세우며 원칙을 고수하는 김병로 대법원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법조계 인사들을 만날 때면 "헌법 잘 계시느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깎듯이 대하고 어려워 했다고 한다.

9년 4개월 동안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1888-1964)는 우리나라 사법의 뼈대를 세운 분이다.

그가 정치 권력으로 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추앙받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항일운동 경력이다.

가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순창에서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했다.

또 100여 건 이상의 항일변론을 맡았다.

6·10 만세운동, 백두산 펑펑고을 화전민사건, 대구 학생 비밀결사, 광주학생사건, 안창호 변론 등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이승만 등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둘째는 해박한 법률지식이다.

가인은 경성전수학교(서울대 법대 전신)에서 유일한 조선인 교원으로 그의 명강의는 유명했다.

명쾌한 논리와 방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 법전편찬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세째는 강직한 성품과 청렴한 생활이다.

공사(公私) 구분이 추상같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법원 직원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다.

1957년 이임사에서 "전 사법 종사자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

그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명예롭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법원이 이러한 가인을 기려 그의 고향인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 '가인연수관'을 세웠다.

심적산과 추월산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담양호와 가인이 어릴 적 공부하던 낙덕정을 굽아보는 곳이다.

<전북일보에서 인용>

가인연수원 뒷편에 있는 정자에서 후미팀을 기다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10여분 가파르게 올라온 북추월산

날머리 직전에 있는 산신산

오늘의 날머리인 천지재(29번 도로)

오늘 뒷풀이는 삼결살 파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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